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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일요일 [브라질: 여인의 음모]영화의 회상 2023. 10. 19. 12:19
어느 일요일, 엄마아빠는 외출하고 동생도 어디론가 놀러나가, 나혼자 집에 남아 텔레비전을 보던 한낮이었다. 사연 게시판에서 익숙한 도입부 아닌가? 대부분 이런 때는 사건이 벌어진다. 뭔가 기이할 정도로 재미있는 사건이. 하지만 솔직히, 대부분 그런 사건은 드물다. 게시판들의 공포, 애로, 유머 사연도 어디선가 들어본 이야기를 적당히 조합해 지어내는 경우가 많을 것 같고 말이다.
집에 아무도 없는 조용한 휴일 한낮에 갑자기 뭔가 재미있는 일이 생기긴 힘들다. 그리고 그럴 경우 인간의 지루함을 달래주는 건 공상이다. 아니면 천재적인 누군가 만들어내 멀리까지 대량으로 퍼뜨린 공상을 감상하거나 말이다. 그래서 그날 나도 텔레비전을 켰고 텔레비전에서는 일요일 한낮에 하는 주말의 명화 프로그램이 방송되었다.
그날 주말의 명화 프로그램에서 신나는 모험 영화나 애절한 드라마 같은 게 나왔으면 그냥 재미있게 보고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따라 나온 희한한 영화가 나의 뇌리에 지금까지도 남았다. 일요일 한낮의 따사로운 햇살과 안방 보료 위에 비스듬히 앉아 그걸 멍하니 지켜보던 어린 나의 나른한 기분까지도 뇌리에 새겨졌다. 그것은 [여인의 음모]라는 뜬금없는 제목을 단 미국 영화, 원제는 ‘브라질’이라는 영화였다.
누군가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영화가 있다. 기이한 시공간을 창조하며 관념적이기 짝이 없는 내용이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겨주는 영화들. 인간이 지극히 인간적인 어떤 활동들뿐 아니라 추상적인 사고의 과정도 흥미로워하는 존재라는 것을, 새삼 시각적인 매체로 깨우쳐주는 영화들.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 본 [존 말코비치 되기]나 근래 나온 [인셉션] 같은 영화들이 그런 영화일 텐데, 영화 자체는 매우 흥미로웠지만, 내 인생에 남은 영화는 아니라서 말이다.
그런 영화들을 '지적인 영화들'이라고 퉁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내가 본 최초의 지적인 영화가 [브라질]이었다. 온갖 전선이 뒤엉킨 회색 도시에서 관료제를 탈출하려는 사무직 노동자의 이야기. 영화 제목은 좀 뜬금없지만 영화 내용은 그랬다. 전형적인 디스토피아 영화였다. 실제로 각본가이자 감독이 [1984]에서 영향을 받았다고도 밝혔고 말이다.
하지만 [브라질]은 [1984]보다는 훨씬 발랄한 상상력이 가미된 뒤죽박죽의 영화였다. 사무원 주인공이 중세 기사의 몽상을 하는 장면들도 그랬고 미친 듯 얽힌 전선을 잡고 날아다니는 구원자이자 빌런, 로버트 드니로의 전기공 같은 모습도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스토리의 진행 자체는 엉망진창이었고 이렇다 할 서사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했다. 지금 보라고 해도 아마 재미가 없어 집중이 안 될 것 같다.
하지만 초등생이었던 나는 나중에는 거의 네 발로 기다시피 텔레비전 앞으로 바짝 다가가 정신없이 화면을 들여다봤다. 한 장면도 놓칠 수 없다는 듯이 집중했다. 그것은 시각적 자극이었을까 지적인 자극이었을까. 어쨌든 덕분에 나는 그날 하루가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모처럼 혼자 보낸 시간이 너무 흥분됐다. 또 그런 기회가, 그런 휴일이, 다시 생기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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