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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콘서트]가 유행시켰던 20세기 요절녀가 21세기에도?영화의 회상 2025. 3. 6. 15:22
병약한 여주인공, 한때 로맨스 서사의 클리셰 중의 클리셰였던 설정이다. 창백한 피부, 가녀린 몸매, 애달픈 표정, 수동적 성격의 그녀는 남주인공의 사랑은 받다가 젊은 나이에 눈을 감는다. 남주인공은 슬퍼하며 그후로도 오랫동안 그녀를 잊지 못한다. 이렇게 쓰면 대부분은 불치병 로맨스의 대표작이자 옛날 옛적 고전 영화 [러브 스토리]를 떠올리겠지만, 너무 옛날 작품이어서 그런지 나도 단편적 영상과 정보만 알뿐, 직접 본 기억은 없다. 하버드에 다니는 남대생과 바사에 다니는 여대생이 티격태격하다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는데 여자가 백혈병에 걸려 죽는다는 스토리다. 아마 이때부터 ‘백’혈병은 아름답고 치명적인 병으로, 한동안 로맨스 콘텐츠 계를 휩쓸었을 것이다. 내가 어린 시절 텔레비전에서 직접 보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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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가 본 연인의 비극 [흑인 오르페]영화의 회상 2024. 11. 14. 16:31
많은 아이들이 그랬겠지만 나에게 유년 시절은 TV 애니메이션에 열광하던 시기였다. 그 시절 좋아했던 만화영화들은 장난꾸러기들의 모험 서사가 대부분이었는데, 가끔 공주, 왕자의 사랑 이야기가 나와도, 그건 정말 사랑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세계로 가는 창구의 개방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그때의 작품들을 하나하나 추억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왠지 지금의 나는, 내가 큰 다음에는, 그런 영화들을 돌이켜 봐도 그다지 감흥이, 글을 쓸 정도의 느낌이 일어나질 않는다. 심지어 지금도 어린이들의 모험 영화 같은 것은 꽤 좋아하는 장르에 속하는데도 말이다. 어린 시절의 영화들을 돌이켜 보려 하면, 우연히 본 ‘성인’ 영화들만 몇 편씩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때 빈티지스럽던 화면의 색채나, 그 주변 집구석의 먼지를 비추던 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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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라군] 혹은 [파라다이스]와 미성년자의 성영화의 회상 2024. 10. 24. 18:30
원래는 브룩 실즈의 [블루 라군]이었다. 이 영화도 역시 주말에 텔레비전에서 틀어주던 해외(미국) 영화 중 한 편이었다. 여객선을 타고 대양을 횡단하던 어린 소녀와 소년이 적도 부근의 무인도에서 조난을 당한다. 소녀와 소년은 로빈슨 크루소처럼 생존해 둘만의 섬을 가꿔 나간다. 사실 그 영화의 메인 이벤트는 10대 초반의 성애와 출산이었다. 아직 어린 상태에서 조난당한 소년과 소녀지만 점점 사춘기가 되면서 성에 눈을 뜨고 결국 출산까지 하는 과정이 꽤 현실적으로 묘사되었다. 텔레비전에서 방영되었던 영화니만큼 노골적인 장면은 없었지만, 아직 10대가 되기 전에 영화를 보게 되었던 나는, 그 과정을 눈을 휘둥그레 뜨고 집중해서 보았다. 점차 소녀를 피하고 혼자서 몰래 수상한 짓(자위)을 하기 시작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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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일요일 [브라질: 여인의 음모]영화의 회상 2023. 10. 19. 12:19
어느 일요일, 엄마아빠는 외출하고 동생도 어디론가 놀러나가, 나혼자 집에 남아 텔레비전을 보던 한낮이었다. 사연 게시판에서 익숙한 도입부 아닌가? 대부분 이런 때는 사건이 벌어진다. 뭔가 기이할 정도로 재미있는 사건이. 하지만 솔직히, 대부분 그런 사건은 드물다. 게시판들의 공포, 애로, 유머 사연도 어디선가 들어본 이야기를 적당히 조합해 지어내는 경우가 많을 것 같고 말이다. 집에 아무도 없는 조용한 휴일 한낮에 갑자기 뭔가 재미있는 일이 생기긴 힘들다. 그리고 그럴 경우 인간의 지루함을 달래주는 건 공상이다. 아니면 천재적인 누군가 만들어내 멀리까지 대량으로 퍼뜨린 공상을 감상하거나 말이다. 그래서 그날 나도 텔레비전을 켰고 텔레비전에서는 일요일 한낮에 하는 주말의 명화 프로그램이 방송되었다. 그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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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집 비디오 [뱀파이어]와 [에일리언]영화의 회상 2023. 2. 20. 19:23
어린 시절, 엄마의 친구가 나보고 놀러오라고 했다. 그러니까 동네 아줌마 하나가 자신의 집에 꼬마 아이들을 불러모았다. 그집 아이들은 남자 형제라서 나랑 여동생은 관심 없어 하던 집이었는데, 엄마의 친한 친구인 아줌마가 남녀 불문하고 열 명쯤의 꼬마들을 불러모으니 안갈 수는 없었다. 뭔가 하고 가봤더니 자기네 집 비디오 플레이어 자랑이었다. 새로 산 기계에서 영화를 틀 수 있다고 했다. 그집 안방 텔레비전 앞에 열 명의 꼬마들이 모여 앉아 간단한 간식을 먹으며, 아줌마가 틀어준 영화를 보았다. 그게 내가 처음으로 본 비디오 영화였다. 아직 비디오 대여점도 성행하기 전인데, 비디오 테이프가 어디서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화질이 매우 좋지 않았다. 그리고 영화 내용도 너무 이상했다. 그 동안 주말의 명화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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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의 임무 [미션]영화의 회상 2022. 10. 27. 10:46
내가 태어나서 처음 극장에 가서 본 영화는 [미션]이었다. 학교에서 단체 관람을 갔었다. 내가 성당에 다니고 있어서 그런지 엄청 감동적으로 봤던 천주교 관련 내용이었는데, 성당에서 단체 관람을 간 영화는 아니었다. 초등학교에서 단체 관람을 간 거였다. 어린 마음에도 왜 학교에서 종교 영화를 단체 관람 하지,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학교는 종교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거창한 생각까지는 아니었더라도 말이다. 얼마전에, 평일 오후에 지하철역으로 가다가 입구에서 십대 청소년들이 우르르 나오는 걸 보았다. 교사로 보이는 인솔자도 눈에 띄었다. 여기는 도심이니 소풍은 아닐 텐데 말이다. 나는 호기심을 못 참고 한 명을 붙들고 물어 보았다. “학생, 다들 어디 가는 거예요?” 그러자 붙들린 소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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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 구멍의 성인 영화영화의 회상 2022. 8. 13. 16:37
내가 어릴 때, 나의 부모는 서울 외곽에 단독주택을 지었다. 그냥 집장수들이 양산하던 '양옥집'들 중 하나였지만 그래도 취향이 조금은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 시절에 무려 에어컨도 설치돼 있었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에어컨은 안방에만 설치되고 뒷부분은 거실로 향해 있었다. 그러니까 실외기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일체형 에어컨이어서, 앞으로는 찬바람을 내뿜고 뒤로는 더운 바람은 내뿜는 기계가 안방과 거실 사이 벽을 뚫고 설치돼 있었던 것이다. 원래는 창문에 설치하는 에어컨인데, 창문을 막기는 싫고, 안방과 거실 사이 벽은 내력벽이 아니라 가벽이니까 구멍을 뚫기가 쉬워서 그랬던 것 같다. 또 그 시절엔 가족이 주로 안방에 모여 생활하던 시절이었으니까. 텔레비전도 안방에만 있고. 하지만 지난 번 에피소드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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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의 영화와 생과자영화의 회상 2022. 8. 8. 22:02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은 토요일 저녁이면 안방에 모여 ‘주말의 명화’라는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방송국에서 한국 성우들이 더빙한, 유명 할리우드 영화를 텔레비전으로 보여주는 거였다. 그 당시 한국인들이 영화를 보는 방법은 대체로 두 가지였다. 극장에 가서 (자막이 달린) 영화를 보거나 텔레비전 방송으로 ‘주말의 명화’를 보거나. 나의 부모는 꽤 영화를 좋아했지만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극장에 가지는 않았다. 그저 토요일 저녁에 식사를 하고 나서 다함께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과일을 깎아먹으며 남이 선택한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다. 일요일 낮에도 영화를 틀어주는 편성이 있었지만 우리집은 성당에 가서 오래 시간을 보내다가 올 때가 많았으므로, 그건 잘 보지 못했다. 주말 저녁에 어떤 영화들을 보았는지는 하나도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