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 때, 나의 부모는 서울 외곽에 단독주택을 지었다. 그냥 집장수들이 양산하던 '양옥집'들 중 하나였지만 그래도 취향이 조금은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 시절에 무려 에어컨도 설치돼 있었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에어컨은 안방에만 설치되고 뒷부분은 거실로 향해 있었다. 그러니까 실외기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일체형 에어컨이어서, 앞으로는 찬바람을 내뿜고 뒤로는 더운 바람은 내뿜는 기계가 안방과 거실 사이 벽을 뚫고 설치돼 있었던 것이다. 원래는 창문에 설치하는 에어컨인데, 창문을 막기는 싫고, 안방과 거실 사이 벽은 내력벽이 아니라 가벽이니까 구멍을 뚫기가 쉬워서 그랬던 것 같다. 또 그 시절엔 가족이 주로 안방에 모여 생활하던 시절이었으니까. 텔레비전도 안방에만 있고. 하지만 지난 번 에피소드와 함께 생각을 해보면 기분이 좀 그렇다...
어쨌거나 그래서 결국 안방과 거실 사이 벽에는 에어컨으로 인한 약간의 틈이 생겼다. 안방 문을 닫아도 완전히 방음이 안 되었다는 뜻이다. 벽에 난 에어컨 구멍에 에어컨이 꽉 끼지 않고 슬쩍 벌어져 있기 때문에.
토요일 저녁이면 우리 가족은 늘 주말의 명화를 함께 보았지만, 가끔 엄마가 우리 자매를 쫓아낼 때가 있었다. 영화가 성인용이라는 이유였다. 그래봐야 공중파 방송국에서 송출하는 영화가 얼마나 야하겠냐만, 뭔가 진한 키스 장면이 나오기라도 하는지, 우리를 못 보게 했던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조르고 떼를 쓰며 안방에서 같이 영화를 보게 해달라고 시끄럽게 굴었지만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를 내보내고 안방 문을 잠갔다. “흥, 그러면 우리가 못 볼 줄 알고? 에어컨 틈새로 보면 되는데?” 그러고 나서 우리 자매는 거실의 에어컨 틈새에 눈을 댔다가 귀를 댔다가 하면서 어떻게든 보려고 용을 썼다. “그쪽이 더 잘 보여?” “여기가 더 잘 들린다!” 가끔 틈새에 입을 대고 소리도 지르곤 했다. “다 보이지롱~ 다 들리지롱~” 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아무것도 알아듣거나 알아볼 수 없었고 우리는 결국 건넌방으로 가서 일찍 자야 했다.
그렇게 어린 시절 성인(?) 영화 입문이 좌절당했으니 이후에는 욕심을 낼 만도 하건만, 자랄수록 난 그다지 야한 영화에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가끔 보면 징그럽다는 느낌이 들 때가 더 많았다. 물론 나의 취향에 잘 맞게 조율된 작품은 좀 다르겠지만… 내가 영상보다는 글을 더 좋아하는 인간이라는 게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게 바로 이 성인 콘텐츠에 대한 취향 문제다. 그 이야기는 언제쯤 쓰게 되려나.